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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5. 7. 9. 10:09

2015.07.09.

그러니까 이런 거에요. 유리창이 있고, 바깥에는 폭풍우가 쳐요. 방 안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고, 브람스 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면 느낌이 어떤가요? 고독해 보이죠. 그럴 때 저는 그 유리창을 깨 버리죠. 폭풍우가 들이치면 고독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돌이 막 날아오니까 집중해야 해요. 세계가 풍경으로 보일 때 우리는 고독한 거에요. 내가 있고, 나머진 다 그림인 거죠. 그리고 세계를 만지고 싶지 않죠. 그냥 앉아서 차 한잔 마시면서 보고 싶은 거에요. 보다가 졸리면 자고요. 풍경은 뭐에요? 만지거나 몰입하거나 하는 대상은 아니죠. 그냥 이렇게 내가 내 중심에 있는 거에요.


그런데 풍경의 특징은 하나의 풍경이 다른 풍경으로 바뀌어도 상관없다는 거죠. 하나의 영화가 다른 영화로 바뀌어도 크게 상관이 없는 것처럼요. 그래서 상대가 '아무래도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헤어져야 될 것 같아' 라고 말하면, 상대를 풍경으로 보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얘기하죠. '그래, 행복했으면 좋겠어' 라고요. 쿨해요. 다음에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되니까요. 고독을 느낄 때 고독이라는 것의 일차적 징후는 바로 그런 거에요. 세상이 다 풍경으로 보여요. 세상이 다 죽어 있는 걸로 보이는 거에요. 몰입할 것이 없는 거죠.


(중략)


그런데 나를 야단치거나 뭐라고 하는 사람을 풍경으로 볼 때, 나는 어떻게 될까요? 저 창 밖에 있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보호가 될 거에요. 그런데 동시에 그 안에 갇히죠. 고독이 좋다는 분들은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을 거에요. 대신 다시는 세상과 접촉하지 못해요. 지금 상처받은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막을 치는 것은 괜찮아요. 한 번 정도면 되는데, 아예 그 안에 들어가서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건 갇힌 거죠. 언젠가는 그 풍경으로 보는 세상을 찢고 나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독은 일회용 반창고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상처가 날까 봐 계속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생살에 그렇게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가는 탄력이 있던 피부도 어느 사이엔가 쭈글쭈글해질 겁니다. 한 마디로 아름답지 않게 된다는 거에요.


고독은 병에 비유하자면 자폐증과 같은 겁니다. 자폐 증상이 있는 아이들은 세계가 너무 큰 충격을 줬을 때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요. 가령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죽었다면 아이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충격을 받으면 안으로 들어간단 말이에요. 나가기 무서우니까 잠근 거에요. 그렇게 아이처럼 잠가요. 보호받으려고요. 고독은 그런 거에요. 마치 방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면 세상이 그림이 돼요. 아이는 바깥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죠. 안에 들어가 있으면, 평과가 오고 봄이 와도 몰라요. 그래서 그 안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언젠가는 열고 나와야 합니다. 언제 열고 나가죠? 이게 고독한 사람이 가진 일종의 병폐인데요, 밖이 안 보이니까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죠. 물론 바깥의 소리는 들려요. 어머니가 혹은 누군가가 그리 해 준다면 좋겠죠. 괜찮다고 계속 안아 주고 따뜻하게 대해 줄 때, 언젠가 한 번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에요.


(중략)


고독해지는 내 모습과 계속 싸워야 할 겁니다.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세계에 몰입하는 걸 찾아야 해요. 그게 상처가 되는 건 맞아요. 촛불이 예쁘면 만지고 싶죠? 그래서 처음에는 그걸 만졌을 테지만 이제 그게 뜨거운 걸 아니까 다시는 안 만지죠. 그러면 촛불은 계속 풍경으로 있는 거에요. 그런데 상처받았다고 바로 떨어져 나가면 나의 세상은 아무 것도 못 만지는 세상으로 변해요. 따뜻한 사람, 혹은 몰입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래서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지는 않지요. 스스로 고독을 깨기 위한 적극적인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춤도 춰 보고 노력은 해 볼 수 있어요. 해 보는 데까진 해 봐야 되겠죠. 어쨌든 방법은 알았으니까요. 그렇게 하다 보면 나를 가두고 있는 그 감옥의 두께가 좀 얆아질 수도 있을 거에요.


(중략)


일단 상처를 전혀 안 받으시려는 분이에요. 촛불을 안 만지려는 분이에요. 전형적인 캐릭터죠. 일종의 고독 상태에 들어가 있는데 가족, 회사 관계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일단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게 예쁜 사람 콤플렉스인데요, 나는 착하고 예쁜 사람이어야 하고,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여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돼요. 이건 아기와 같은 상태인 거에요. 이런 사람들은 주변 눈치를 보면서 일을 해요. 주위에서 예쁘다고 하면 일을 하죠.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행동을 하느라 자신이 욕망하는 건 전혀 안 하실 거에요. 그러니까 한 번도 스스로 촛불을 만졌거나 뭘 잡아 보거나 하지 않은 거에요. 자기가 욕망한 것에 몰입하지 않은 겁니다.


(중략)


바보들만 '내가 판단을 한게 잘못 됐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자신이 판단한 것을 스스로 부정해 버리죠. 결국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판단할 때 '지금은 이게 맞아, 오케이' 이렇게 해요.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행동을 개시하죠. 물론 조금 지나고 나서 후회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럼 아닌 거고요. 다르게 행동하면 되죠. 그러니까 예쁜 사람 콤플렉스가 그거에요. 한 번의 선택으로 완벽한 스토리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 주저하는 겁니다. 지금 선택이 완벽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지요. (중략) 헷갈릴 때 여러분들이 하셔야 될 게 감각을 믿는 거에요. 확신이라는 것을, 미래로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감각을 믿읏세요. 힘들면 냄새만 생각하세요. 마치 좋았던 이성의 냄새를 기억하는 것처럼, 대개 냄새는 영원히 가요. 감각만 믿으시면 돼요. 머리 쓰지 말고요.


(중략)


'이게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여러분은 결정을 못 해요, 평생. 그러니까 결정을 하고, 거기서 실패도 하고, 또 거기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또 새롭게 결정하고, 거기서 다시 배우는 겁니다.


(중략)


과도한 몰입이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과도한 몰입이라는 건, 하나를 알게 되면 다른 하나를 못 한다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 다른 일을 한다는 건 몰입하지 않고 이것 저것 조금씩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영화에만 몰입하면 안 되고 엄마도 가끔 봐야 되는 거에요. 이런 걸 해 줘야 돼요. 이걸 보통 어른이라고 불러요.


(중략)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지 마세요. (중략) 그래서 중요한 건 미국에 있느냐, 한국에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에요. 여행을 제대로 하려면 어디를 가더라도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있는 곳이고 중심이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여행을 떠났을 때 자꾸 집이 중심으로 남으면, 멀리도 못 떠나고 제대로 떠나지도 못해요.


(중략)


몰입하기 전에 먼저 가치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러면 삶은 제스처가 되어 버려요. 우리가 그래서 잘 살지 못하는 거란 만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거에 몰입이 딱 되면 몰입의 정도만큼 몰입해서 좋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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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5. 6. 25. 00:50

2015.06.25.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4‬ RNKSV)

요즘 '사랑'과 '용서'에 관한 짧은 묵상 일정을 따라 말씀을 묵상하는 중인데, 이 한 구절만 5일에 걸쳐 묵상하도록 설계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따끔거리면서 따뜻해지고 숙연해진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 맛이 나는 쌀알 같다. 온전한 사랑은 이토록 포근하고 담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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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사 11회와 12회에 걸쳐 소개된 에피소드 중, 공효진이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 가로등이 켜지지 않아 이를 걱정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김수현은 다음 날 곧바로 공효진에게 불이 들어오는 펜을 선물하였고, 차태현은 하루종일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씨름하여 가로등을 수리하였다. 물론 공효진에게 알리지 않은 채.

그저 공효진이 계 탄 로맨틱 에피소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장면을 보는 내내 '배려'의 의미에 대해 곱씹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어두운 밤 가로등 없는 거리에서 행여나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신만의 사랑과 배려를 실천했는데, 한 남자는 휴대용 불빛을, 한 남자는 가로등을 선물한다. 한 남자는 선물을 예쁘게 포장해 여자를 웃게 하고, 한 남자는 자신의 배려를 드러내지 않아 여자의 오해를 산다. 물론 극중에선 금세 해결이 되었지만.

보여지는 휴대용 불빛은 분명 상대에게 행복을 주는 배려이며 그 자체로 소중하다. 모두가 뚝뚝하게 티 안내고 가로등만 고쳐주려 한다면 민들레씨처럼 소소한 낭만과 로맨스는 지구상에서 멸종해버릴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가로등에 더 끌리고, 차태현의 마음이 더욱 성숙하고 깊다고 느끼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효진이 차태현을 지켜주는 방식 역시 가로등과 같았고, 서로 그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두 사람이 부러웠다.

그동안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배려는 작은 불빛과 같진 않았을까 돌아보게 된다. 조금은 더 크게 보고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때로는 묵묵히 상대방 몰래 씨름하여 가로등을 고쳐놓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 상대방을 오래오래 행복하고 편안하게 하는 23도와 같은 배려를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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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하고 내려놓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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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5. 6. 20. 17:07

2015.06.20.

사랑니를 뽑았다. 위 아래 오른쪽 왼쪽 하나씩 있는 것도 모자라 왼쪽 아래에는 무려 두 개나 자리하고 있단다. 사랑니 부자라니, 진화가 덜 되도 한참 덜 되었나보다. 

 뽑기 전엔 이렇게 아픈 건지 몰라서 꽤나 용감하게 예약을 하고 꽤나 가벼운 마음으로 치과로 향했다. 마취주사까지도 괜찮았는데, 우지직 우지직 깊숙히 숨어있는 이를 조각내고 부러뜨리고 들어내는 동안 내 턱관절이 부러지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뽑고 난 후에는 약간의 쇼크와 덜 풀린 마취 때문에 통증을 느낄 정신이 없었지만, 서서히 마취가 풀리면서 왼쪽 볼이 농구공만 하게 부풀어 오르고 몸살처럼 몸 전체가 열이 나고 욱신거렸다. 이래서 사람들이 사랑니라고 하는구나.

 인간은 간접경험을 통해도 배울 수 있는 고등 동물이지만, 역시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사랑니를 뽑는 아픔은 내가 태어나서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육체적 고통이 분명했다. 예전엔 사랑니라는 단어를 노래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떠올린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볼이 부어오른 사람들 혹은 마스크나 냉찜질팩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을 보면 성형보다 사랑니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니 발치 예약을 한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낼 것이다. 냉찜질과 온찜질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조언도 덧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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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를 뽑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모든 약속과 일정을 취소하고 며칠 간 꼼짝없이 집에만 있었다. 첫날엔 아프면서도 좀이 쑤시고 멍하고 지루하기만 했는데, 그동안 미루고 있었던 영화와 책들을 하나 둘 씩 챙겨보고,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아픈 입은 꼭 다물어 말을 아낀 채 느긋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소한 감각들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고요한 오후 멍하니 정원을 내다보며 햇빛 색깔이 바뀌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폭 안겨 새근새근 잠자는 강아지의 말랑따끈한 체온, 차분한 빗소리와 간간히 들리는 새소리 등 오감으로 느끼는 자극부터,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더 하고싶어지는 사람 마음의 간사함 (생전 생각도 안 나던 탕수육, 볶음면 등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들이 왜 한꺼번에 그렇게 먹고싶던지), 내 몸 구석구석의 소중함 (입을 제대로 벌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던가) 등 조금은 더 형이상학적인 생각들까지 - 소소하지만 잊고 있던 것들에 마음껏 침잠하여 고요히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이 익숙하지 않은 고요함이 외롭고 지루하고 낯설었는데, 이틀 째가 되니 그동안 내 마음이 얼마나 필요없는 많은 외부 자극에 푹 절여져 있었는지, 얼마나 부질없이 분주하기만 했는지 깨달았다. 진정한 휴식은 마음을 담백하게 해준다. 그리고 바보같은 나는 아직까지도 아플 때에만 - 그래서 모든 신체 활동이 어쩔 수 없이이 음소거되어야할 때에만 - 비로소 그러한 휴식을 느낀다. 아, 스페인 포르투칼을 여행했을 때에는 몸 건강히 그러한 휴식을 즐겼었다.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알사탕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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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에세이집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처음엔 조금 밋밋했다. 정원이 있는 집에 살고, 늘 꽃을 보고, 가끔 부모님을 도와 정원을 가꾼 경험이 있었기에 이러저러한 식물과 원예 이야기로 시작되는 서두를 포기하지 않고 붙들 수 있었지만, 왠지 노년의 헤세의 감성이 지금의 나와는 맞지 않을 것 같은 거만한 의심을 품고 짤막한 에세이들을 읽어나갔다. 대문호 앞에서 감히 주름을 양껏 잡은 셈인 것이다. 어딜가든 꼭 들고가고 싶을 만큼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주는 책인 줄도 모르고. 

 몇몇 에세이는 그야말로 한 줄 한 줄을 다 옮겨놓고 싶을만큼, 마음이 아리도록 공감할 수 있었다. 인류가 구름 뭉텅이처럼 느끼고 지나가는 감정들을 어떻게 이렇게 한 올 한 올 crystal clear하게 문장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걸까. 가장 날카로운 핀셋을 들고 한 겹 한 겹 감정을 해체해 옮겨놓은 이 작가의 영혼은 얼마나 예민하고 투명하고 또 아팠을까. 언젠가 카카오 스토리에 옮겨놓았던 문구가 생각났다. "It is both a blessing and a curse to feel everything so very deeply."

 개인적으로 에세이들 중 <잃어버린 칼>, <잠 못 이루는 밤들>, <작은 기쁨>이 정말 좋았다. 나중에 몇몇 부분만이라도 발췌해서 꼭 포스팅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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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5. 2. 18. 01:40

2015.02.18.

며칠간은 시차적응 때문에 고생을 좀 할 것 같다. 오늘도 낮잠을 두시간 반이나 잤으니..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도 말짱하기만 하니 오늘도 잠은 네다섯시에나 들려나보다. 간만에 조용히 혼자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정리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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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있어 여행의 의미는 '용기'이다. 바쁜 일상과 당면 과제에서 잠시 벗어나 보고 듣고 먹고 걸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집채만하게 느껴졌던 문제는 제 크기를 찾게 되고,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마음 구석구석이 풍성하게 차오른다. 또한 이리저리 부딪히고 헤메면서 세상은 역시 완벽하지 않아도 행복한 곳이라는 것, 그리고 따뜻한 도움의 손길들로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상황이 변하는 건 없지만 잃었던 용기를 되찾는 것. 그게 내게 있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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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주간의 여행은, 뭐랄까, 정말 꿈만 같았다. 꾹 눌려있던 용수철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오르듯이, 나는 그 시간 내내 정말 날아갈 듯 가벼웠다.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감사했다. 바싹 마른 스펀지가 순식간에 물을 빨아들이듯 내 마음이 정신없이 아름다움과 생기와 기쁨을 한없이 흡수하는 것만 같았다. 비록 정말 힘들었지만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음에 누릴 수 있는 자유.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준 모든 사람들 뿐 아니라, 이 모든 자극을 가슴깊이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했다. 감사할 것 투성이었고, 순도 200%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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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행의 또 한 가지 테마는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운 건축물에, 풍경에, 공연에, 사람들에 푹 빠져들면서, 미술사학도로서 내가 사랑했던 '미'가 주는 본질적 행복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메세지의 홍수인 현 사회가 필요로하는 건 알함브라 궁전의 성스러울만치 섬세한 장식과 같은, 아무런 메세지도 담기지 않은 (혹은 그 메세지가 매우 절제되어 아름다움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닐까. 현재 예술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과 대화해보고 싶은 주제이다. 왜 사람들이 바빠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 문화생활을 하려고 하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을 접하는 건 선택사항이 아니라 건강한 마음을 위한 필수사항. 앞으로 꼭 주기적으로 문화생활을 즐겨야지. 미술이든, 음악이든, 자연탐방이든, 무엇이 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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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함께 한 언니와의 깊은 대화도 이번 여행의 행복을 완성해준 하나의 축이었다. 원래부터 밝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맑고 귀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3살이나 어린 동생이지만 늘 존중해주고, 칭찬도 충고도 아낌없이 해주는 진심어린 언니의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기쁨과 슬픔을 진심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없다는 사실을 알 만한 나이가 되어서, 이렇게 서로 사심없이 기뻐하고 슬퍼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 미스터땡땡이장미언니 고마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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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와의 대화는 언니에 대해서 뿐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세비야에서의 마지막 밤에, 처음으로 맛이 없었던 타파스(딸기크림을 곁들인 까망베르 튀김 + 가스파쵸)와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서로를 설명하는 형용사를 휴지에 쭉 적어내렸다. 언니가 선택한 나를 설명하는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예쁜
오밀조밀한
분석적인
긍정적인
합리적인
멋있는
상큼한
단호한
어른스러운
반짝반짝한
늘씬한
견고한, 단단한
환한
고급진
믿음직스러운
적극적인
당당한
복잡한
섬세한
똑부러지는
현명한
사리분별에 능한
쳐다보게 되는
호감가는
불타는 사랑을 하고싶어하는
23도 같은
Paris
전형적이지 않는
알함브라 궁전같은
아보카도같은
살구색
백합 
English breakfast tea latte

 언니가 물론 좋은 면만을 써준 것이기에 엄청나게 좋은 쪽으로 biased 되어있는 기록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 리스트를 통해 사람들이 보는 나의 모습이 어떤지, 그게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self image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나 또한 무릎을 치게 하는 형용사들도 몇 개 있었고 (23도 같은, 분석적인, 복잡한), 들어서 정말 기분 좋은 형용사들도 있었고 (대부분, 특히 멋있는, 환한, 고급진, 호감가는, 전형적이지 않은, 알함브라 궁전같은), 알쏭달쏭한 형용사들도 있었는데(아보카도같은, Paris, 살구색, 백합), 어찌되었든 남이 보는 나 자신에 대해 이렇게나 자세하게 탐구해보는 게 처음이어서 재밌었고, 언니가 나를 이해하는 깊이가 남다름에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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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여행에 너무 푹 빠져있던 바람에 여행지에서 치뤘던 인터뷰와 합격소식은 오히려 양념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인터뷰를 통해 느꼈던 전율과 합격 이메일을 읽고 느꼈던 무한 감사는 여행의 기쁨과 어우러져 더욱 잊지못할 순간들이 되었다. 절대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내 행복의 코어가 아님을 깨달은 걸까. 내가 걱정했던 진공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내가 많이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이것도 조만간 기록으로 남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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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무한하다고 느켰던 순간. 내 안에 다른 감정 하나 없이 오직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응원하고 위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만 가득찼던, 그 환했던 순간의 가슴벅찬 행복은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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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4. 12. 31. 17:26

2014.12.31.

어느덧 2014년의 마지막 날이다. 청마의 해가 밝았다며 여기저기서 파란 말을 모티브로 한 광고들이 눈에 띄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내일이면 파란 양의 해다. 파란 양..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억세게만 느껴졌던 올 해 보다는 조금은 더 부드럽고 포근한 한 해일 거라 기대해본다.

친구와 우스갯소리처럼 한 이야기였지만, 올 한 해는 달력 한 장 한 장을 고이고이 접어 화르르 불꽃을 피우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힘들었다. 곰곰 생각해보면 무엇 때문에 마음이 그렇게 팍팍하고 힘들었는지 - 그리고 아직도 그러한지 - 잘 모르겠다. 진로를 결정하고, 그에 맞춰 준비하고, 논문을 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들 중 가장 힘들다거나 가장 멘붕할 만한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고 지치기만 했을까.

오늘 엄마와 아침을 먹다 문득 깨달은 것은, 한 해 한 해 지남에 따라 책임감은 늘어가고 표현은 줄어든다는 것. 혼자서도 해낼 수 있는 마음의 역량과 혼자서도 해내야 한다는 기대, 그리고 변화하는 친구 관계 속에서, 아직 어느 한 쪽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나는  딱 그만큼 버겁고 외로웠던 것 같다. 

고 3 시절에는 기숙사 방에만 들어오면 깔깔거리고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내 마음의 capacity가 크지 않아 그를 넘어가는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없이 내려놓고 흘려보낼 수 있었다면, 이제 나는 내려놓고 싶을 때에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힘이 생겼고, 시시콜콜 모든 걸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없이도 어느정도는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원했든 원치않았든 나는 그래야만 하는 일련의 상황속에 놓여졌고, 깨어지지 않고 단단해진 나 스스로가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쉬어야할 때 쉬어가는 방법을 잊었고, 기대야할 때 기대는 것에 서툴어진 것도 사실이다. 지난 한 해, 정확히는 논문 주제를 잡은 5월 전후부터, 마음 푹 놓고 쉬어본 날이 언제였던가. 하고싶은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에 더 큰 무게를 두는 나이가 되면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제발 세상이 2주만 멈췄으면, 2주만 아무 생각 안 하고 쉴 수 있다면, 정신없이 돌진해오는 데드라인들의 홍수에서 딱 2주만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래서 여름에 아팠었고,그래서 난 그 홍역이 너무나 달콤했다. 그 시간을 통해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막 깨달아가는 걸음마 단계인지라 마음은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버렸다. 첫 술에 배부르랴. 세상 모든 게 정반합인걸.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았으니 마음이 다시 중간 지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 잘 어르고 달래면 될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자연스럽게 그 균형이 회복될거라 기대하고 소망한다.  

꾹꾹 눌러담은 눈물이 얼음이 되었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그 시간을 어떻게 웃으며 보내야하는 지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속없이 해맑기는 이미 틀린 것 같지만, 많은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도 꼬임 없이 밝은 사람이고 싶다. 어두워지지 않고 깊어지고 싶다. 그래서 이유를 모르겠는 힘듦과 외로움이 그 이유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왕 주저리주저리 어두운 얘기만 잔뜩 쓰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

후회없이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어서, 아팠지만 더 크게 아프지 않아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 나눌 수 있어서, 성장할 수 있어서, 나 자신을 알아가는 기쁨이 있어서 감사했던 올 한 해. 내년엔 마음에 늘 감사와 사랑이 넘쳐났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온전한 따뜻함의 통로가 될 수 있었으면.  새해 복 많이 받자 예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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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3. 6. 16. 12:30

2013.06.16.

찬란했던 시간을 함께한 우리. 일상 속에서 문득 너로 인해 만들어진 기억, 습관, 생각, 행동들을 마주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널 생각하게 돼. 서로에게 남겨진 서로는 평생 남아있을테니까 괜찮아. 고맙고 미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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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3. 5. 26. 09:35

2013.05.26.

사람에겐 저마다의 이별 방식이 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별 방식. 어반자카파의 노래 같이, 드라마틱하지도,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은, 주파의 파고가 조금씩 낮아져가며 소멸해가는, 모질지도 마냥 착하지도 못한 그런 서글픈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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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3. 4. 19. 21:38

2013.04.19.

오늘 꽁기꽁기한 기분으로 점심을 먹는데, 엄마께서 얼마 전 읽으셨던 <네 가지 질문>이라는 책에 실린 한 가지 에피소드를 말씀해주셨다. 


한 유태인 남성은 유년 시절 겪었던 6일간의 끔찍한 폭격으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다. 그 이후 평생동안 공포감과 상실감에 시달려왔고, 치유받기 위해 저자를 찾아갔다. 남자의 슬픔, 공포, 분노를 잠잠히 듣고 있던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6일 간의 폭격과 수십년 간의 자학 중 어느 것이 더 잔인한 것 같냐고. 폭격은 6일로 끝이 났는데, 왜 평생 스스로 폭격을 가하고 또 당하고 있냐고. 


나의 괴로움, 나의 슬픔, 나의 분노 -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들어낸 것임을 깨닫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다. 그런 감정들을 야기한 외부 조건들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져서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쩌면 이 모든 행복하지 않은 감정들이 나의 산물임을 인정하기 싫어서인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이 복잡하디 복잡한 마음들이 온전히 내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그것이 설사 힘들었던 지난 시간에서 오는 것이든, 다른 사람에게서 받았던 상처에서 오는 것이든, 모든 열쇠와 주도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임을 인식해야한다. '어쩔 수 없이,' 혹은 '주어진' 이라는 수동의 탈을 쓰고 나 스스로를 푹푹 찔러대는 일은 일찌감치 그만 두어야 한다.


그리고 난 빨리 중간고사 공부에 집중해야한다 ㅜㅜ 으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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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3. 3. 4. 22:46

2013.03.04.

또 하루가 지나가네
빨간 노을이 밉기만 한 저녁
매일 보는 이 풍경도
오랜 추억인 듯 아련해질까
시간은 참 야속하기만 해
아쉬울 때 더 빨리 흐르네
어느 새 다가와 버린 그 날에
우린 어떤 모습일까

눈물은 보이지 않기를
행여 어두운 표정 스치지 않기를
다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웃으며 보낼 수 있기를

쉽게 잠이 오질 않아
매일 조금씩 멀어져가는 기분
꿈꾸듯 너를 보내고
눈을 뜨면 다 지나가 있기를
너와 함께 다 견뎌왔기에
더욱 불안한 마음 숨길 수가 없네
또 다시 빨라진 가슴 가만히 쓸어내리며
다 괜찮아 잘 할꺼야

서로가 만든 빈 자리를
자꾸 미안하다 말하지 않기를
다만 어쩔 줄 모르는 지금 우리 모습
너무 빨리 잊지 않기를

어깨 활짝 펴고
항상 당당하길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아프지 않길

어쩜 우리 잘 살아왔나봐
함께여도 외로운 세상에
이렇게 가슴 먹먹한 사람 있다는 게
참 고맙고 행복해 친구야

눈물은 보이지 않기를
행여 어두운 표정 스치지 않기를
다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웃으며 보낼 수 있기를

서로가 만든 빈 자리를
자꾸 미안하다 하지 않기를
다만 어쩔 줄 모르는 지금 우리 모습
너무 빨리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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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3. 2. 26. 09:48

2013.02.26.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왔다. 긴 시간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마음이 어쩐지 간질간질했다. 유치원에 혼자 가는 어린이도 아니고, 올해 나이 스물 다섯이지만 새로운 사람들로 가득찬 곳에 혼자 첫 발을 내딛을 땐 여전히 조금은 불안하다. 설레고 초조하고 기대되고 걱정되고.. 부산한 마음 때문인지 나를 잘 아는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스쳤다. 강아지마냥 사람이랑 옷자락 끝이라도 붙어있어야 마음이 푹 놓이는 내 자신이 조금은 우스웠다. 가족들과 떨어져지냈던 시간동안 의존성으로부터 꽤나 일찍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난 독립적이고 싶어하는 사람이지 태생적으로 독립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솔직히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찾지 못하고 '나의 대학원 생활은 실로 암울하겠구나' 하며 속으로 꺼이꺼이했었는데, 그야말로 기우였다. 이미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금세 친해질 수 있었던 마음 맞는 언니 동생들도 만났고, 지적 카리스마를 마구마구 발산하시는 유머러스한 교수님들도 많이많이 만났다. 내가 앞으로 속할 커뮤니티와 하게 될 공부에 대한 신뢰와 동기부여를 주는 시간이었다. 감사해요! 


지하철역에 내려 다른 학생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직은 낯설기만 한 이 곳이 이제는 내 학교라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새로이 느끼는 소속감. 빨리 열심히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난 정말 공부와 친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수강신청도 다 끝났으니, 남은 황금 방학을 여유롭게 즐기면서 개강을 기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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