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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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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5. 6. 20. 17:07

2015.06.20.

사랑니를 뽑았다. 위 아래 오른쪽 왼쪽 하나씩 있는 것도 모자라 왼쪽 아래에는 무려 두 개나 자리하고 있단다. 사랑니 부자라니, 진화가 덜 되도 한참 덜 되었나보다. 

 뽑기 전엔 이렇게 아픈 건지 몰라서 꽤나 용감하게 예약을 하고 꽤나 가벼운 마음으로 치과로 향했다. 마취주사까지도 괜찮았는데, 우지직 우지직 깊숙히 숨어있는 이를 조각내고 부러뜨리고 들어내는 동안 내 턱관절이 부러지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뽑고 난 후에는 약간의 쇼크와 덜 풀린 마취 때문에 통증을 느낄 정신이 없었지만, 서서히 마취가 풀리면서 왼쪽 볼이 농구공만 하게 부풀어 오르고 몸살처럼 몸 전체가 열이 나고 욱신거렸다. 이래서 사람들이 사랑니라고 하는구나.

 인간은 간접경험을 통해도 배울 수 있는 고등 동물이지만, 역시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사랑니를 뽑는 아픔은 내가 태어나서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육체적 고통이 분명했다. 예전엔 사랑니라는 단어를 노래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떠올린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볼이 부어오른 사람들 혹은 마스크나 냉찜질팩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을 보면 성형보다 사랑니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니 발치 예약을 한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낼 것이다. 냉찜질과 온찜질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조언도 덧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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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를 뽑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모든 약속과 일정을 취소하고 며칠 간 꼼짝없이 집에만 있었다. 첫날엔 아프면서도 좀이 쑤시고 멍하고 지루하기만 했는데, 그동안 미루고 있었던 영화와 책들을 하나 둘 씩 챙겨보고,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아픈 입은 꼭 다물어 말을 아낀 채 느긋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소한 감각들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고요한 오후 멍하니 정원을 내다보며 햇빛 색깔이 바뀌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폭 안겨 새근새근 잠자는 강아지의 말랑따끈한 체온, 차분한 빗소리와 간간히 들리는 새소리 등 오감으로 느끼는 자극부터,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더 하고싶어지는 사람 마음의 간사함 (생전 생각도 안 나던 탕수육, 볶음면 등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들이 왜 한꺼번에 그렇게 먹고싶던지), 내 몸 구석구석의 소중함 (입을 제대로 벌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던가) 등 조금은 더 형이상학적인 생각들까지 - 소소하지만 잊고 있던 것들에 마음껏 침잠하여 고요히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이 익숙하지 않은 고요함이 외롭고 지루하고 낯설었는데, 이틀 째가 되니 그동안 내 마음이 얼마나 필요없는 많은 외부 자극에 푹 절여져 있었는지, 얼마나 부질없이 분주하기만 했는지 깨달았다. 진정한 휴식은 마음을 담백하게 해준다. 그리고 바보같은 나는 아직까지도 아플 때에만 - 그래서 모든 신체 활동이 어쩔 수 없이이 음소거되어야할 때에만 - 비로소 그러한 휴식을 느낀다. 아, 스페인 포르투칼을 여행했을 때에는 몸 건강히 그러한 휴식을 즐겼었다.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알사탕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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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에세이집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처음엔 조금 밋밋했다. 정원이 있는 집에 살고, 늘 꽃을 보고, 가끔 부모님을 도와 정원을 가꾼 경험이 있었기에 이러저러한 식물과 원예 이야기로 시작되는 서두를 포기하지 않고 붙들 수 있었지만, 왠지 노년의 헤세의 감성이 지금의 나와는 맞지 않을 것 같은 거만한 의심을 품고 짤막한 에세이들을 읽어나갔다. 대문호 앞에서 감히 주름을 양껏 잡은 셈인 것이다. 어딜가든 꼭 들고가고 싶을 만큼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주는 책인 줄도 모르고. 

 몇몇 에세이는 그야말로 한 줄 한 줄을 다 옮겨놓고 싶을만큼, 마음이 아리도록 공감할 수 있었다. 인류가 구름 뭉텅이처럼 느끼고 지나가는 감정들을 어떻게 이렇게 한 올 한 올 crystal clear하게 문장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걸까. 가장 날카로운 핀셋을 들고 한 겹 한 겹 감정을 해체해 옮겨놓은 이 작가의 영혼은 얼마나 예민하고 투명하고 또 아팠을까. 언젠가 카카오 스토리에 옮겨놓았던 문구가 생각났다. "It is both a blessing and a curse to feel everything so very deeply."

 개인적으로 에세이들 중 <잃어버린 칼>, <잠 못 이루는 밤들>, <작은 기쁨>이 정말 좋았다. 나중에 몇몇 부분만이라도 발췌해서 꼭 포스팅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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