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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2015. 2. 18. 01:40

2015.02.18.

며칠간은 시차적응 때문에 고생을 좀 할 것 같다. 오늘도 낮잠을 두시간 반이나 잤으니..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도 말짱하기만 하니 오늘도 잠은 네다섯시에나 들려나보다. 간만에 조용히 혼자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정리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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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있어 여행의 의미는 '용기'이다. 바쁜 일상과 당면 과제에서 잠시 벗어나 보고 듣고 먹고 걸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집채만하게 느껴졌던 문제는 제 크기를 찾게 되고,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마음 구석구석이 풍성하게 차오른다. 또한 이리저리 부딪히고 헤메면서 세상은 역시 완벽하지 않아도 행복한 곳이라는 것, 그리고 따뜻한 도움의 손길들로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상황이 변하는 건 없지만 잃었던 용기를 되찾는 것. 그게 내게 있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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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주간의 여행은, 뭐랄까, 정말 꿈만 같았다. 꾹 눌려있던 용수철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오르듯이, 나는 그 시간 내내 정말 날아갈 듯 가벼웠다.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감사했다. 바싹 마른 스펀지가 순식간에 물을 빨아들이듯 내 마음이 정신없이 아름다움과 생기와 기쁨을 한없이 흡수하는 것만 같았다. 비록 정말 힘들었지만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음에 누릴 수 있는 자유.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준 모든 사람들 뿐 아니라, 이 모든 자극을 가슴깊이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했다. 감사할 것 투성이었고, 순도 200%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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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행의 또 한 가지 테마는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운 건축물에, 풍경에, 공연에, 사람들에 푹 빠져들면서, 미술사학도로서 내가 사랑했던 '미'가 주는 본질적 행복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메세지의 홍수인 현 사회가 필요로하는 건 알함브라 궁전의 성스러울만치 섬세한 장식과 같은, 아무런 메세지도 담기지 않은 (혹은 그 메세지가 매우 절제되어 아름다움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닐까. 현재 예술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과 대화해보고 싶은 주제이다. 왜 사람들이 바빠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 문화생활을 하려고 하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을 접하는 건 선택사항이 아니라 건강한 마음을 위한 필수사항. 앞으로 꼭 주기적으로 문화생활을 즐겨야지. 미술이든, 음악이든, 자연탐방이든, 무엇이 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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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함께 한 언니와의 깊은 대화도 이번 여행의 행복을 완성해준 하나의 축이었다. 원래부터 밝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맑고 귀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3살이나 어린 동생이지만 늘 존중해주고, 칭찬도 충고도 아낌없이 해주는 진심어린 언니의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기쁨과 슬픔을 진심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없다는 사실을 알 만한 나이가 되어서, 이렇게 서로 사심없이 기뻐하고 슬퍼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 미스터땡땡이장미언니 고마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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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와의 대화는 언니에 대해서 뿐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세비야에서의 마지막 밤에, 처음으로 맛이 없었던 타파스(딸기크림을 곁들인 까망베르 튀김 + 가스파쵸)와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서로를 설명하는 형용사를 휴지에 쭉 적어내렸다. 언니가 선택한 나를 설명하는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예쁜
오밀조밀한
분석적인
긍정적인
합리적인
멋있는
상큼한
단호한
어른스러운
반짝반짝한
늘씬한
견고한, 단단한
환한
고급진
믿음직스러운
적극적인
당당한
복잡한
섬세한
똑부러지는
현명한
사리분별에 능한
쳐다보게 되는
호감가는
불타는 사랑을 하고싶어하는
23도 같은
Paris
전형적이지 않는
알함브라 궁전같은
아보카도같은
살구색
백합 
English breakfast tea latte

 언니가 물론 좋은 면만을 써준 것이기에 엄청나게 좋은 쪽으로 biased 되어있는 기록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 리스트를 통해 사람들이 보는 나의 모습이 어떤지, 그게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self image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나 또한 무릎을 치게 하는 형용사들도 몇 개 있었고 (23도 같은, 분석적인, 복잡한), 들어서 정말 기분 좋은 형용사들도 있었고 (대부분, 특히 멋있는, 환한, 고급진, 호감가는, 전형적이지 않은, 알함브라 궁전같은), 알쏭달쏭한 형용사들도 있었는데(아보카도같은, Paris, 살구색, 백합), 어찌되었든 남이 보는 나 자신에 대해 이렇게나 자세하게 탐구해보는 게 처음이어서 재밌었고, 언니가 나를 이해하는 깊이가 남다름에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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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여행에 너무 푹 빠져있던 바람에 여행지에서 치뤘던 인터뷰와 합격소식은 오히려 양념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인터뷰를 통해 느꼈던 전율과 합격 이메일을 읽고 느꼈던 무한 감사는 여행의 기쁨과 어우러져 더욱 잊지못할 순간들이 되었다. 절대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내 행복의 코어가 아님을 깨달은 걸까. 내가 걱정했던 진공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내가 많이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이것도 조만간 기록으로 남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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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무한하다고 느켰던 순간. 내 안에 다른 감정 하나 없이 오직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응원하고 위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만 가득찼던, 그 환했던 순간의 가슴벅찬 행복은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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